
전 세계적으로 방대한 수의 인구가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국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는 기독교인들이 이민 문제를 성경적으로 균형 있게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는 기사를 실었다. 아래는 크리스천 투데이의 19일(일요일) 기사 전문이다.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가 2024년 중반 발표한 최신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이주민 수는 약 3억 400만 명에 달한다.
사람들이 이주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이주는 긍정적 이유와 부정적 이유로 나눌 수 있다. 긍정적으로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이주하며, 부정적으로는 기존의 거주지에서 쫓겨나거나 빈곤·전쟁·박해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경우를 들수 있다.
이주의 원인이 다양한 만큼, 이주에 대한 태도 역시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규모 이주민이 유입된 국가들이나 혹은 이주 국가로 거론이 되는 국가 모두에서 이민 문제는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짐바브웨나 모잠비크(Mozambique)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미얀마의 로힝야(Rohingya) 무슬림이 방글라데시로 향하는 경우,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또는 아프리카·중동·동유럽에서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 국가로 향하는 사례를 예로 들 수 있다.
이주민들이 향하는 모든 나라에서 ‘이들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라는 문제는 정치인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사안이며, 기독교 교회들도 이러한 분열을 공유하고 있다. 이에 본 기사에서는 기독교인이 이러한 논쟁적 질문들을 어떻게 신학적 틀 속에서 이해하고 공적 논의에 기여할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합의해야 할 네 가지 비타협적 원칙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성경은 인간이 성별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고 가르친다(창 1:26-27).
또한 성경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일반 명령이 레 19:18, 마 19:19, 롬 13:9) 너희 중에 거류하는 나그네를 사랑과 정의로 대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일깨운다.
미국 개혁교회(Reformed Church of America)가 제시한 ‘이주 신학(Theology of Migration)’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방인이나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그들에게 마땅한 정의를 왜곡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 전반에 반복되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동 중인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이 존엄과 존중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반대로 이방인과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멸시하거나 정의를 왜곡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출 22-23장, 신 23-24, 27장, 렘 7, 22장, 스 7장, 에 22장, 시 146편, 말 3장, 마 25장).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방인을 그 땅의 시민과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명한다(출 12장, 레 24장, 민 9, 15장, 에 47장). 또한 피난처(민 35장, 여 20장)나 생존을 위한 음식과 물자(레 19, 23장, 신명기 14, 24, 26장)가 필요한 외국인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 우리는 이주 문제를 논할 때 위선을 피해야 한다. 성서학자이자 신학자인 크리스 라이트(Chris Wright)는 다음과 같이 같이 지적했다 “이민자와 난민 문제가 서방 국가들에서 뜨겁게 논의될 때마다, 가장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노골적인 위선이다. 거의 모든 서방 국가는 수 세기에 걸쳐 이민의 역사를 경험했다. 미국과 호주는 거의 전적으로 이민의 결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그중 일부는 피와 억압으로 얼룩져 있다. 영국의 주요 산업 부문들 역시 외국인 노동력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 세력은 ‘성문을 닫자’며 타인을 배척하려 한다.
또한 언어 속에도 위선이 숨어 있다. 왜 영국인들이 해외로 나가 경제적 기회를 추구할 때는 ‘주재원, 국외 거주자(expatriate)’라 부르고, 같은 이유로 영국에 오는 사람들은 ‘이민자(migrant)’라고 비난하는가?”
라이트는 이어 이렇게 덧붙인다. “역사적 관점의 결여 또한 위선이다. 500년 전 유럽인들은 대규모로 ‘이주’를 결정했다. 그들은 세계 곳곳으로 나가 정복하거나 식민지를 세웠고, 허락도 비자도 필요 없었다. 그냥 가서 차지하고, 수 세기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가 되돌아오는 것이다. 오늘날 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의 위기 상당수는 유럽의 팽창주의, 식민주의, 노예무역, 아프리카와 중동 분할 등 과거 유럽이 저지른 역사적 불의에서 비롯됐다.”
라이트는 이러한 통찰이 중동에서 유럽으로 밀려드는 수백만 난민 문제의 해답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이 문제를 논의하고 기도할 때 최소한 겸손과 도덕적 우월감의 절제가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고 강조한다.
셋째, 기독교 윤리는 모든 국가가 무제한적 이민을 허용하지 않고 일정한 국경 질서를 유지해야 할 도덕적 근거를 인정한다. 윤리학자이자 영국의 보수주의 사학자 나이젤 비거(Nigel Biggar)는 국가 윤리와 관한 그의 저서(Between Kin and Cosmopolis – An Ethic of the Nation)에서 “국경은 한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을 규정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동의 무제한 허용은 통제되지 않은 이민을 불러오며, 이는 토착민들에게 침입으로 느껴질 수 있다. 성공적이고 평화로운 이민은 협상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이민자는 주인의 문화를 존중하고 어느 정도 그 방식에 따를 의지를 보여야 하며, 토착민은 새로운 이웃과 그들의 낯섦에 적응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브래드 리틀존(Brad Littlejohn)은 자신의 논문 ‘이민의 신학(Theology of Immigration)’에서, 자유로운 이민을 주장하는 이들이 흔히 ‘손님 접대(hospitality, 환대)’의 성경적 의무(히 13:2)를 인용하지만, 그것이 곧 국경 철폐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손님을 초대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이 있어야 한다. 즉, 벽과 문이 있고, 그 문은 열리고 닫히며 필요할 땐 잠글 수도 있어야 한다. 만약 아무나 드나들게 두면, 그것은 집이라기보다 쉼터에 가깝다.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때로는 환대보다 가족의 안전과 필요를 우선해야 함을 본능적으로 안다. 어떤 낯선 이는 너무 위험해서 들일 수 없고, 또 다른 이는 해롭지 않지만 가족의 자원과 시간을 과도하게 요구할 수도 있다. 물론 이웃과 낯선 이를 전혀 들이지 않는 집 역시 건강한 집이라 할 수 없다. 즉, 환대는 집의 본질적 기능이지만, 무제한적 환대는 집을 무너뜨릴 수 있다. 국가는 집과 같다. 이웃에게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아무도 보호할 수 없다. 국경 없는 국가는 벽 없는 집과 같다.” 결론적 그는 “모든 피조물의 선은 그 한계를 인식할 때 비로소 유지된다”고 덧붙였다.
이 네 가지 원칙을 현재 각국의 이민 논의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인간은 (이미 이주했든, 이주를 희망하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웃으로서 사랑과 정의로 대우받아야 한다. 둘째, 과거 영국인들이 다른 나라로 이주해 기회를 찾았듯, 정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나라에 이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셋째, 이것이 곧 국경을 완전히 개방하라는 뜻은 아니다. 가정의 구성원 수가 한정되듯, 국가 역시 수용할 수 있는 이민의 범위에 적절한 한계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민 정책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신중함(prudence)’의 덕목에 근거해야 한다. 즉, 주어진 상황 속에서 윤리 원칙을 지혜롭게 적용하는 능력이다.
리틀존의 말을 다시 빌리면, “우리는 국경을 존중하며, 먼저 우리 공동체를 돌보고, 그다음으로 이웃과 모든 사회의 가난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어 “얼마나 자주 사람들을 초대할지, 입양을 고려할지와 같은 문제에 확실한 답은 없다. 마찬가지로, 각 국가는 자국의 안전·번영·문화적 결속을 고려해 수용 가능한 이민 규모를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는 “가장 자비로운 영혼이라도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토착민과 이민자 모두를 장기적으로 위해서라면, 새로운 입국자의 수에 엄격한 제한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기독교인은 현재의 이민 논쟁 양극단과 동일시될 수 없다. ‘외국인은 모두 거부하라’는 주장에도, ‘모든 외국인을 받아들여라’는 구호에도 동조할 수 없다. 기독교인이 해야 할 말은 이렇다. 외국인은 환영받아야 하지만, 한 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이민의 규모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다. 영국이 3억 400만 명의 이민 희망자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의는 누가 영국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결정이 합리적이고 일관된 기준 아래 내려져야 하며, 주거·복지 등 이민자 지원의 부담이 전국적으로 공정하게 분담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이처럼 미묘하고 균형 잡힌 답변은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단순한 구호는 아닐지라도, 기독교인이 이민 문제에 대해 해야 할 올바른 답이다.
[저작권자ⓒ 뉴스타임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